요가의 시작은 신경증이다.

태생적으로, 불가피하게 신경질적인 혹은 신경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지금 요가는 그들로부터 기인된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요가 경전은 그런 신경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만, 아주 사소한 단서라면 많은 Asanas(좌위법)이 신경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불안과 신경질적인 요소가 ‘혼란(chaos)’을 상징한다면, 수많은 자세들은 그것을 통제하는 혹은 성난 파도를 잠재우는 바다의 신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작가의 기본 자질은 우울함이다.”라고 말한 작가의 문장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하여 요가의 시작은 신경증이고, 요가의 지속이자 연료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것으로부터 야기되든 상관없이, 통제가 발생하려면 통제되지 않는 상황 곧 자신의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금 과장하자면, 요가는 모든 신경질적인 사람들을 위한 위대한 도구이며, 추운 겨울날 마시는 코코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언가 찌뿌둥한 느낌, 불안정한 마음, 어깨 결림, 허리 통증,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을 신경질적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어떤 시각으로 보면, 모든 예술적 기질, 곧 불안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은 ‘요가’에 끌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불안이라는 잡히지 않는 그림자를 잡으려고 매일 애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안으로 향하는 사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지만 불안을 타고난 사람,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 그들은 모두 요가를 시작하기에 이미 충분한 사람임을 몸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걸 요가적으로 해석하는 바보 같은 일일지도 모르곘지만, 요가의 의미는 그만큼 방대하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요가가 더 각광받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또 건강한 삶 혹은 웰니스라고 불리는 어떤 ‘바람’이나 ‘흐름’들이 우리에게 ‘와 닿는’ 이유는 신경증과 불안기질이 요가를 부르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그만큼 우울하고, 불안정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우스갯소리지만, 그만큼이나 요가를 오래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꽤나 불안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퍽 예민하고, 소리없이 우는 사람들에게 요가는, 명상은, 어떤 기괴한 자세들과 몸을 기괴하게 묶는 자세들은, 분명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으로 자신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평생 요가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요가애 대해 관심이 없거나,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르바 핀다 아사나라든지, 쿠르마 아사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을 넘어 “글렇게까지..”라는 생각을 할 지 모른다.)

요가는 단순히 명상, 자세, 그런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요가는 기도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기도가 어떤 대상을 향해 혹은 대상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라면, 요가는 신을 통과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을 명확히 들여다보는 정신분석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은 어떤 근거도 없는 느낌과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으르고, 느긋한 사람들이 요가를 오래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걱정이 없는 사람들은 요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기본적인 연료인 불안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자주 미소짓고, 자주 웃고, 자주 햇빛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일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걸 그저 편안하게 받아들일지 모른다. 반면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일상에서 짧게 비춰지는 어떤 행복을 극대화하여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 외에 나머지 모든 시간들은 비소섞인 얼굴로 바라본다. 그들은 덜 웃되, 깊이 웃을 것이다. 전자는 많이 웃되, 넓게 웃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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