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는.

나는 타지에서는 줄곧 꽤 일찍 잠에서 깨는 편이다. 나는 잠에 대해서는 늘 이렇게 설명하는데, 잠은 죽음이고, 깨어나는 것은 생명이다 라고 말이다. 알람을 맞춰놓기는 하지만, 깨어나는 것은 보통 나의 의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기독교에서 설명하는 구원의 구조와 같은데, 내가 죄사함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사함을 ‘스스로’ 얻었다고 표현하는 오해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유익하다고 ㅡ 이런 표현이 옳을란지는 모르겠지만 ㅡ 경험했던 설교자들은 “당신이 스스로 죄사함을 얻은 게 아닙니다.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그 더러운 죄들을 당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끔히 해치워준 분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에요!” 라고 선포했다. 나는 이 이해의 순서가 잠의 도식을 이해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난 잠에서 깼어.”라는 식의 능동형 문장을 쓰지만, 그 문장은 실제로 “잠이 날 깨웠고, 나는 이제 비로소 잠에서 깨어났다고 표현할 수 있게 됐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은 죽음이고, 깨어나는 것은 생명이다.

뜬금없는 이야기로 운을 떼어냈지만, 나는 지금 11월 11일, 내 하루를 적어보려 하고 있다. 일찍 잠에서 깬다는 문장을 시작으로 다시 이어가자면, 나는 오전 7시에 하타 요가 수업을 듣는다. 수련장에는 보통 6시 50분에 도착해서 가볍게 몸을 풀고 7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하타 요가 수업에 몸을 적신다. “적신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만큼 땀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보통은 에어컨이 없는 이런 곳에서 요가 수련은 대부분이 비크람요가(핫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선풍기가 있음에도 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련의 강도가 높고 중간에 거의 쉬지 않고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 나가기 때문에 땀이 온 몸을 적신다. 사실 이것은 기분이 꽤 좋다. 일상에서 이렇게 땀이 나는 경험을 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특이한 취향에 관한 고백이지만, 나는 이렇게 땀이 나는 1시간 가량의 요가 수업을 자주 경험하게 되면서 ‘땀흘림’에 대해서 굉장한 선호가 생기기도 했다. 여기서 자세히 이야기 할 대목은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겠다.

오전 7시 수업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다. 보통은 나 혼자 남성이고, 모두가 여성이다. 이따금씩 남성이 들어오긴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내가 초보 수련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일종의 위화감을 조성하지는 않는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우보다는, ‘남성’치고는 생각보다 잘한다는 눈초리로 나를 볼 뿐이다. 생각보다 유연하다는 것에 조금씩 놀라는 감상을 나에게 보낸다. 나는 그것이 읽혀진다. 딱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다. 때로는 약간의 희롱섞인 말도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여성들이 그런 희롱을 하는 것이 일종의 관심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좋게 받아들인다. 어차피 이런 타지에서 혼자 그런 말에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니고. (그 내용들은 저 남자 생각보다 괜찮은데, 너 한 번 잘해봐 라는 식이다)

조금 부정적인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지만, 사실 수업의 질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요가를 지도하는 선생님은 열정적이고, 핸즈온도 섬세하게 잘 해주신다. 나는 매일 조금씩 유연해지는 몸을 느끼고, 더운 나라에서 즐겨먹는 장아찌 류의 음식처럼 소금끼 가득한 땀에 흠뻑 절여진 채 수업을 마친다. 한국에서는 시체자세(사바아사나)도 꽤 길게하는 편이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곳에서 사바 아사나를 10분 이상 해본 경험이 없다. 이는 마치 모계사회의 색깔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곳에서 여자들은 쉴 틈이 없다. 삶 자체에서 길게 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요가도 강하고, 꽤나 높은 난이도의 아사나를 목표로 훈련한다. 이는 꽤 흥미로운 사회학적 모양이다. 매일 아침 아이를 먹이고, 또 일을 하고, 꽤나 바쁘게 여성으로서의 업무 ㅡ 긴 머리 관리하기, 손톱 칠하기, 살 빼기 등 여성 활동을 말한다 ㅡ 를 처리해야하는 이들은 요가를 할 때도 잘 쉬지 않는다. 힘들다고 끙끙거리지만 결국 1시간 동안의 긴 훈련을 끝내 이겨낸다. 이들에게 가장 큰 보상이자 쉼, 그리고 사바아사나는 높은 난이도의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 일종의 전유물로 남기는 것이다. 그것은 사바아사나보다 달콤하고, 더 긴 혜택을 제공한다. 사바아사나는 잠깐이지만, 어려운 자세를 성공한 자신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영원하다. 아, 이 유혹을 이길 사람은 도대체 누가 있는가?

수련을 마치고 사람들이 나가면 수련장은 잠시나마 고요를 맞이한다. 여기 사람들은 수련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이기 때문에, 긴 정적이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힘들면 힘들다고 찡찡거리고, 카운트가 늦어지면 몇몇 사람들이 카운트를 빨리 끝내자며 큰 소리를 낸다. 선생님은 웃으며 “더 버텨!”라고 말한다. 나는 가끔씩 군대와 같다고도 느낀다. 한쪽에서는 “더, 더, 더!”라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그만, 그만, 그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마치 놀이처럼, 매일 반복된다. “들어와, 들어와, 들어와!”라고 말하는 엄마와 “아직, 아직, 아직!”이라고 말하는 철없는 자녀처럼, 이는 매일 반복된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꽤 적응이 안 되었지만, 지금은 그러려니한다. 가끔 영어로 소통이 되는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수다스러운 수련 방식이 이상하지 않냐고 묻곤 했는데, 나는 “그럴 수도 있죠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렇게 수련을 마치고 수련장에서 나오면, 나는 보통은 강한 햇살을 느끼며 숙소까지 걸어온다. 따뜻한 봄과 여름 사이를 걸은지 1년 반이다. 꽤나 더워지는 한국의 6월 여름, 그때 내가 길을 떠났으므로 나는 추운 겨울을 경험하지 않은지 1년 반이 된 것이다. 헐렁이는 나시를 입고 지낸지 1년 반, 나는 이렇게 따뜻한 나라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햇살에게 말한다. 아주 간소한 식사로 아침을 대신하고, 나는 숙소에서 짐을 챙겨 카페에 나와 글을 쓰기 시작한다. 매일 써도 글의 양이 줄지 않는 건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다. 나는 나에 관해서, 내가 느낀 것들에 관해서, 매일 기록하고 쓰고, 마치 청소라는 건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엄마의 말처럼 반복해서 쓰고 또 쓴다. 글쓰기는 마음의 청소인 셈이다. 매일 쌓이는 먼지를, 매일 뒤섞이는 생각이라는 장난감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마음의 청소를 30분, 길게는 1시간 정도 이어서 하고, 생각이 너무 많을 때면 그것을 오히려 멈추지 못하고 두시간, 세시간, 네시간, 계속 이어나가다 못해 “이제 그만.”이라고 자신에게 지겹다는 듯이 말한다. 기분이 이상하게 안 좋거나, 슬픔이 몰려오면 다섯 시간, 여섯 시간, 그 공상에 대해서 계속 적어대고, 이제는 지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만큼 좋은 취미이자, 좋은 ‘친구’는 없다고 말한다.

글쓰기가 어느 정도 끝나면 책을 읽는다. 두 시간 정도, 50분씩 끊어서 두 번 읽는데 11월에 읽고 있는 책은 에마뉴엘 카레르의 <요가>이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인생의 해석> 이다.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카페는 동일하다. 나는 가깝고, 글을 쓰기가 편하고, 책을 읽기가 좋은 꽤 분위기 있는 카페에 앉아 매일 3시간 정도를 보낸다. 책을 읽고나면 바로 옆에 있는 곳에서 양질의 점심 식사를 먹는다. 점심 식사는 내가 가장 배불리, 영양가 있게 먹는 시간이다. 내가 매일 점심 식사를 하는 이곳은 예쁜 그릇에 나물과 국, 밥과 주반찬이 하나씩 바뀌어 나온다. 무엇을 먹을지 음식을 고르는 것조차 스트레스가 되는 나에게 이런 식당은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운 곳이다. 사실 무엇을 먹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나는 급식처럼 매일 정해진 곳에서 다르게 나오는 이런 식단을 매우 편안하고, 유용하게 생각한다. 어느새 이곳에서 식사를 한지 2주가 넘었다.

식사를 하면 어느새 가장 뜨거운 12시가 넘어가고, 나는 오후에 또 다른 카페에 가서 영화를 본다. 나는 주로 오후에는 일본 영화를 본다. 이상하게도 저번 유럽 여행 이후 서구권이 사용하는 이미지에 대해서는 흥미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 그렇게 다른 세계를 갈망했나, 이질적으로만 느껴지는 셈이다. 일본 영화에서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문화적인 표현 조차도 다소 신선하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나는 종종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대사를 따라한다. 그렇게 오후를 보낸다. 매일 가는 카페에서는 이제 내가 시키는 메뉴를 외우고 있다. 이것은 약간의 특권처럼, 특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를 보다가 지루허면 다른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낯선 세계에서, 또 다른 낯선 이미지를 탐방하며 마치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에서 음악을 들으며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차원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하고, 아직 뜨겁지만 3-4시 사이가 되면 나는 숙소로 돌아와 언어 공부를 한다. 그 나라의 언어를, 그 나라의 세계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몇 문장 되지 않아도 나는 나의 언어와 그것들을 비교해가며 하나씩 씹어 삼키고, 오래 기억하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조금씩 공부를 이어나가다보면, 적어도 내가 가는 곳에서 기본 적인 말들을 하는 ‘일반인’이 되어간다. 이전에는 완전한 이방인이었다면, 언어를 통해 나는 일반인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저녁 식사를 안 하기 때문에 4시에 가볍게 과일을 먹는다. 4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는 되도록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속을 비워낸다.

저녁에는 한 번의 수련이 더 있다. 저녁에는 개인 수련을 1시간, 개인 운동을 1시간 함께 진행한다. 저녁에도 요가 수업이 있지만, 개인 아쉬탕가 수련을 위해 저녁 수업을 듣지는 않는다. 개인 운동을 마친 후 최대한 힘을 다해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마친다. 수련장에서 나오면 어느새 밤이 되어 있다. 어둡지만 공기가 차가운 것은 아니다. 분위기가 으슥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낮과 비슷하다. 약간은 차분해졌지만, 저녁에도 양의 기운이 넘치는 이곳에서 나는 집으로 향한다. 가끔은 헛헛하고, 쓸쓸하다고 느낀다. 또 어떤 날은 기분이 무척 좋다. 모든 시간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축복인 셈이다. 잠들기 전에는 30분간 명상을 한다. 바른 자세로 앉아 하루를 돌아보며, 조금씩 호흡에만 집중하고, 30분을 마치 3분처럼 느낄 수 있도록 깊이 침잠한다. 알람이 울리면 나는 그제서야 잠에 든다. 내일 다시 생명이 나를 깨워줄 것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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