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나는 글과 줄어드는 짐

이것이 수행 혹은 요가와 얼마만큼의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바람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던 나에게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짐과 글쓰기였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짐을 줄이고 ㅡ 그것이 미니멀리스트라는 이름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ㅡ 또 줄였다. 나는 결국 큰 가방 하나와 작은 가방 하나로 짐을 줄일 수 있게 되었는데, 어디에서든 자유롭게 떠돌 수 있기 위해서는 짐을 줄이는 게 필수였으며, 짐이 많은 사람은 영혼 또한 무겁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가방에는 내 평생의 반려자이자 친구가 들어있었는데, 카메라와 노트북이었다. 언제부턴가 촬영은 자주 하지 않았지만, 어떤 순간 곧 이것은 꼭 촬영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혹은 신비한 얼굴이나 몸짓, 어딘가에서도 볼 수 없는 곧 어떤 찰나이자 영원한 순간을 잡아내는 신비한 도구로서 카메라는 열흘을 쓰지 않아도 단 1초라도 써야한다면 갖고 있어야만 했다. 또 다른 녀석은 노트북으로, 나는 이것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어디에서든 내 생각을 쓸 수 있게 해주었기에 이것은 내 뇌와 다름 아니었다. 나는 노트북으로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때로는 편집도 하고, 영화도 보았기에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이 녀석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리고 큰 가방에는 적어도 내가 거지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갈아 입을 옷을 몇 벌 챙겨두었는데 겨울 옷 한쌍과 여름옷 세쌍 정도를 챙겨두었다. 큰 가방의 무게는 항상 7kg을 넘기면 안 되었기에 나는 가능하면, 줄일 수 있는 만큼 옷을 버려야만 했고, 옷에 대한 미련 곧 나를 꾸미거나 하는 방식의 옷의 형식을 포기해야만 했다. 난 항상 햇살이 가득한 그리고 따뜻하고 발랄한 나라에서 지냈기 때문에 사실상 겨울옷은 필요 없었다. 그것마저 버린다면 아마 3키로 정도로 가방이 무척 가벼워질 상황이었다.

가끔은 이 가방을 보면서 수련과 수행, 내가 그 알 수 없는 깨달음을 붙잡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그저 나는 언젠가부터 내 인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 물건들을 소유하는 게 부담스럽고, 버거웠던 것으로 짐을 줄이는 행위를 시작했던 것인데 말이다. 줄어드는 짐과 깨달음의 깊이가 관련이 있을까? 모든 승려들은 미니멀리스트인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찌됐던 간에 줄이고, 줄이고, 또 버리고 버리고, 반복하여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짐을 줄여서 가장 좋은 것은 언제든,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점이며, 어디에도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이기가 현저히 어렵고, 또 심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물질적 실체를 줄일수록, 정신세계는 더욱 혼잡해지는 듯 매일 쏟아지는 글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나는 새끼손가락에 아픔을 달고 살아야 했다. 매일 두어시간씩 글을 반복해서 쓰다보면 새끼손가락이 저려온다. 마디가 아파온다. 다른 손가락은 괜찮은데 새끼 손가락이 유독 아프다. 그래서 때로는 글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깨달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그러나 줄일 수 없고, 나는 쓰고, 기록하고, 내 불어나는 생각을 마치 터진 수도를 막아대듯이 계속되는 글쓰기로 막고, 또 막는다. 그러나 새어나오는 글줄기를 막을 방법은 없다.

그래도 일주일에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는 물건을 바라보며 질식을 느끼는 것보다야, 터무니없는 충동에 이끌려 무언가를 사놓고 숨도 쉬지 않도록 생명을 주지 않는 행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좋다. 차라리, 매일 불어나는 글을 막아대며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은 거야?”라며 투정을 부리고, 저린 새끼 손가락을 풀어내는 것이 더 낫다. 그러고보면 모든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어서, 또 인간의 손이 닿지 않으면 그 ‘생명력’을 잃고 죽어버리는 것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되묻는다. 식물이 아닌, 그저 딱딱한 나무 의지라도 매일 앉지 않으면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나는 내 인식 속에 가 닿는 물건들만 소유하고, 내 인식 속에서 무한히 떠다니는 정신의 문자들을 내 것으로 취하기 위해 오늘도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건 필요한 생각이야, 이건 불필요해, 이건 어떨까, 저것은 말이야, 하고 중얼거린다.

아마도 나에게 가장 효과적인 요가 방식은 아사나가 아니라 명상 혹은 묵언수행일 수 있다. 아, 그러나 묵언 수행을 생각하면 끔찍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 묵언 수행이라니. 그것은 정말 고문이지, 요가는 아니지 않을까? 다만 나는 잠들기 전 명상을 하며,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생각은 결국 모든 것을 이해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삶을 이해해보려는 바보 같은 행위라고. 모든 것을 생각하여, 생각의 끝에 이르러, 생각으로 끝을 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내가 만난 사람들과 헤어진 사람들, 이전에 실수하고 죄를 지었던 것들, 그 모든 행위에 원인과 나의 부족함에 대한 근거를 찾는 것들에 대해서 나는 생각을 멈춰야 한다고. 삶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으로 끝내야 한다고. 그렇게 어떤 지점에 이르면, 나는 그 순간만큼은 편안히 잠에 들 수 있게 된다.

Previous
Previous

잃어버림

Next
Next

나의 하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