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깜빡 두고 온 것

이따금씩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또는 집에서 나와 조금 걷다가 문득 “아,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은데…”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노트북도 챙겼고, 읽을 책도, 수련복과 지갑, 이어폰, 웬만한 건 다 챙긴 것 같은데 속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괜히 멈춰서 가방을 다시 열어보고, 자켓의 두 주머니를 툭툭 치며 확인한다. 음, 뭘 두고 온 거지, 한참 생각해도 두고 온 건 없다. 그럴 때 문득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를 떠올린다. 그리고선 “혹시 두고온 게 지난 날에 대한 그리움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딱히 연락을 하고 싶거나 그런 건 아니다. “잘 살고 있겠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물론 이미 헤어진 마당에 잘 지내든, 못 지내든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더이상 내가 관여할 일도 아니고.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그 감각이 꼭 물건에 관한 건 아니구나. 그건 마치, 때에 따라 스쳐가는 바람 같은 것이구나, 한다. 이렇게 습하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 날, 우연히 어떤 거리를 걷다가 생각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리움이란 감정도 인간이 가진 주요한 것 중 하나기에, 조금은 지질한 모양이어도 지난 날을 훑어보는 일이 꼭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아무튼 뭐 잘 살겠지. 나도 잘 사니까. 나만의 모양으로.

그런데 어제는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헬멧을 벗은 후에 키를 꽂아두고 집에 와서 잠에 들었다. 그런 거나 깜빡하면 안 될 텐데. 아무튼 간에 나이가 드는 건 이런 지질한 모습을 너무 놀라지 않고 바라보게 되는 일 아닐까, 헤어진 여자친구를 가끔씩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키를 꽂아두고 오토바이를 밤새 켜두는 일에 대해서 너무 자책하지 않게 되는. 조금 지질하게 사는 것도 꼭 나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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