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SEAT NO. 43K
비행기 안에 들어가 좌석을 찾기 위해 티켓과 좌석표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티켓에는 Seat No. 43K라고 적혀있었다. 통로를 지나 좌석 쪽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만일 옆에 코를 고는 아저씨가 앉는다면 생각보다 불편하다는 걸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정된 좌석에 이르렀을 때 자리에는 아직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가방을 보관한 후, 나는 무심하게 모자를 눌러쓰고 책에 눈을 고정하였지만 실제로 누가 앉기 전까지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항공권을 살 때마다 다양한 유료 추가 옵션이 많은데, 옆자리에 누가 앉게될 지 선택하는 옵션은 보이지 않는다.
5분 쯤 지났을까 허수아비처럼 꽤나 마른 40대 중년의 남자가 나와 눈을 한 번 마주치고선 복도 쪽 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아주 짙고 강한 담배 냄새가 났다. 냄새는 꽤나 강해서, 어릴적 교실 책상에 오래도록 달라붙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껌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았다. 적어도 하루에 한갑은 족히 피우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지금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는 단지 비행기 안이라서, 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 남자와 나 사이 좌석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남자는 무언가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캐릭터’라는 것이 너무 분명한 사람이랄까? 슬쩍 눈을 돌렸을 때 처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건 그 남자의 신발이었다. 그는 버건디 색상의 뱀가죽 무늬 로퍼를 신고 있었다. 아무래도 뱀가죽 무늬라는 건 꽤나 상징적이다. 신체에 새기는 타투처럼 말이다. 양말은 신지 않았고, 꽤 오래 입어온 것처럼 보이는 청바지에는 세월의 주름이 가득했다. 꽤 말라 보이는 체격으로, 다소 슬림한 청바지를 입고 있는 데도 이 남자의 다리와 청바지 사이에는 널널한 간격이 느껴졌다. 이 남자와 나 사이에 좌석이 하나 비어있는 것처럼. 아마 60kg도 안 될 것이다. 뱀가죽 로퍼와 얄상한 청바지가 마치 그를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무척 잘 어울렸다. 분명 이런 조합은 체형으로 소화하는 게 아니다. 삶의 모양으로, 살아온 시간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옆구리에 뱀가죽무늬의 클러치백을 들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그는 스포티한 스케처스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에 깊이 집중하고 있는 이 남자의 핸드폰에는 젊고 예쁜 여자의 사진이 8개 정도 띄워져있었다. 남자가 손으로 스크롤을 내리는 제스쳐를 취하자 또 다른 여자들이 나타났다. 남자는 그 중에서 (아마도) 본인의 취향에 맞는 여자를 오른손 검지로 눌렀다. 그러자 멈춰있던 사진이 움직이는 영상으로 변했다. 성인 방송 같은 건 아니었다. 중국인처럼 보이는 화면의 여자는 무언가를 말했는데,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야. 너는 이 아름다움을 갖고 싶어? 그렇다면..” 이런 느낌의 설득이 아닐까 추측했을 뿐이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채팅창에 내가 모르는 언어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이따금씩 누군가 통로를 지나가고, 심지어 승무원이 “담요가 필요하세요?”라고 물어도 그는 들리지 않는 듯 핸드폰을 계속 쳐다보다가, 승무원이 어깨를 톡톡 건드리자 그제서야 승무원과 눈을 마주쳤다. 핸드폰 액정에서는 계속 낯선 여자가 이야기 하고 있었다. 삼자대면인가?
흥미롭긴 했지만 계속 흘깃거릴 수는 없으니, 나는 일종의 단념을 하고 잠시 책을 읽는 데 집중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 라는 단편 소설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는데, 영화와 소설이 거의 일치할 정도로 많이 비슷했다. 그렇게 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남자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슬쩍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드름 자국이 가득하고, 꽤나 심술궂어 보이는 얼굴에 그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팔짱을 낀 채 약간 뒤틀린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아마도, 어린 여자아이의 사탕도 쉽게 뻇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악의가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운, 그런 유형의 남자가 아닐까. 어딘가 중국 영화에서 이 사람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끌벅적한 서민 식당에서 주인공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저기 멀리서 다가와 “주인장, 같은 걸로 주쇼.”하고 덤덤히 혼자 앉아서 꽤 급하게 국수를 먹는, 혹은 새벽 4시 도박판 구석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잃은 돈을 아쉬워하며 잠에 든다든지. 강한 자 앞에서 약해지고, 약한 자 앞에서 강해지는 모습 조차도 너무 미워보이지 않는 그런 캐릭터 아닐까.
아무튼 이런 관찰과 상상을 글로 써내기까지 하는 데에는, 나 또한 특별한 의도는 없다. 사실 이건 심심해서 비행기 안에서 상상하며 쓴 소설에 불과하다, 고 말해도 아무도 모를 노릇이다. 확실한 건 내가 지금 이 글을 썼다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