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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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아무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여동생과 함께 지내다가 지금은 이곳에서 혼자 지내는 중이라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여기서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두 가지 이야기가 그녀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했다. 뭐랄까, 용기있고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그날따라 유독 눈썹이 더 짙다고 느껴졌다. 억쎈 눈썹이, 마치 그녀의 강하고 단단한 정신력을 담보하는 듯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꽤 무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재치 덕분에 우리는 가볍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를, 또한 취향을 공유하면서. 사소한 것부터 조금은 심오한 것들까지. 여기에는 음식, 좋아하는 작가, 자는 시간, 좋아하는 운동, 즐겨입는 옷 등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끌리는 것들의 교집합이 클수록 서로 잘맞는 사이가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녀와 나는 그렇게 비슷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나에게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며 “사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달콤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커피 잔을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 다시 그녀가 물었다. “그럼 지금,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 질문에 마치 준비라도 한 듯이 “잘은 모르겠지만, 사랑은 쌓는 작업이 아닐까. 벽돌을 쌓는 것처럼, 어떤 두 사람이든 서로 사랑이라는 것에 근접하기 위해 매일 성실히 노력한다면, 사랑과 비슷한 무언가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 거에요.”라고 답했다. 나는 스스로 대답하면서도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후회를 했고, 그녀는 내 대답에 흥미는 있지만 딱히 원하는 대답은 아니라는 듯 다시 커피를 마셨다. 보통 이럴 때, 다시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는 진지하게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질문은 마음에 숨겨두었다. 그 사랑에 관한 대화를 제외하고서는, 우리는 서로 쉽게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주제들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런 대화도 딱히 의미가 없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꽤 흥미로웠기 때문에 3시간을 훌쩍 넘겼다. 우리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것에 괜한 뿌듯함, 서로 교집합이 크진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박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네요.”
”그러게요.”

긴 대화 끝에 쉼표를 찍는 것처럼 비가 내릴 때 우리는 갑작스레 건조하고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녀는 어차피 비가 오니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가자며 커피를 한 잔 더 시키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번엔 본인이 커피를 사겠다며, 나에게 원하는 커피를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따뜻한 라떼를 요청했고, 그녀는 알았다며 재빠르게 휙 돌아서 주문하는 곳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고, 처음 눈썹에서 느낀 것처럼 그녀의 뒷모습에서 일종의 강인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르지 않은 체형에, 오랜 기간 꾸준히 운동을 하며 다져진 몸이 꽤 다부진 느낌이 들었다. 머리는 허리 부분까지 아주 길게 늘어졌으며, 머리가 얼마나 긴지 머리를 감으려면 30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찰랑이는 긴 머리결에는 다양한 사연이 녹아 있는 듯 보였다. 마치 잘라내면 안 되는, 그녀의 소중하고 어렴풋한 가족에 대한 기억처럼.

그녀가 주문을 마친 후에 멀리서 입모양으로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새롭게 나올 커피와 그녀와 나눌 이야기들이 기대가 됐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금방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비딱하게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서는 창 밖에 비가 내리는 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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