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수양록
오랜 기간 수양록을 적지 않았다. 매일 일기 안에 다양한 생각을 적었지만, 요가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는 수양록에는 따로 무언가를 적지 않았다.
어떤 시점 이후로 요가에 대한 의심이 커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게 도대체 뭘까, 하는 의심의 기간이 찾아오고 나는 한동안 요가를 하면서도, 매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이걸 왜 하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은 이것에 도취되는지 궁금했으며, 치료자라든지 다양하고 신비로운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사이비 지도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어떤 강사의 터치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보게 되는 것이 마치 어릴 적 부흥집회를 보는 듯 했다. 그들은 뭔가 신비로운 것들을 행했는데, 그것이 신비인지, 거짓인지, 사실상 알 수가 없었지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입증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지속했다. 나는 그것이 다소 의심스러웠다.
가끔 어떤 요가원, 명상원에 가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약에 취한듯한 과격하게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지 않는 듯한, 마치 공중에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반기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웃음)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언제나 행복한 사람처럼, 마치 폭풍에 자신의 모든 옷이 발가벗기어져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처럼 새로운 사람을 늘 환대한다. 나는 그런 데서 약간의 징그러움을 느낀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난 그 인사를 받고 속으로 비웃곤한다.
나는 요가 수업을, 적어도 지금은, 철저히 신체수련으로 보고 있다. 또한 신체수련을 통해서 얻는 신체적인 결과가 정신적인 결과를 도출하는데 굉장히 효과적이라고 또한 보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60분을 명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러한 방식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50분간 땀을 흘리고, 온 몸에 힘을 뺀 후에 10분간 명상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힘을 빼지 못하기 때문에, 속칭 몸이 힘들지 않는다면 정신은 맑아지지 못한다. 만일 수련을 통해 매일 몸이 가볍고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신체수련이 필요하지 않은 지점까지 성장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 과도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게으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신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웃음을 짓지 않는다.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체수련은 언제나 증명한다. 골격이, 근육이, 멋지게 다듬어진 몸이, 그리고 그 안에서 뿜어나오는 에너지가. 굳이 자신을 가리기 위해 요기스러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벗고 있는 것이 낫다.
에너지는 밖으로 방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없으며, 숨길 수도 없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멋진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 에너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찾는 걸 좋아한다. 에너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수양을 하면서 진짜인척하는 거짓 지도자들과 딱히 티내지 않아도 진짜인 지도자들을 구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느낌에서 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에너지는 본래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오늘도 요가를 한다. 그러나 난 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그저, 적어도 아직은 내 몸을 쓰고, 느끼고, 발전시키는 게 좋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