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역 4번 출구, 새벽 6시
신사역 4번 출구
새벽 5시,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었지만 피곤함에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은 새벽 5시 15분이었다. 어제 잘 쉰 것 같은데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다리도 아픈데, 하루는 쉬어도 괜찮을까. 자신에게 핑계를 대는 것 같아서 영 마음이 찜찜했다. 마음을 다잡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방에 다시 돌아와 옷을 입을 준비를 했다. 뭘 입을까 고민하다가, 먼저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 집문을 열었다. 여전히 새벽의 온도는 낮았다. 한국의 4월 새벽은 여전히 겨울 같았다. 바닥으로 가라앉은 찬 공기가 다리부터 코까지 올라오는 기분이 좋았다. 아직은 겨울이구나, 하고 문을 닫고서는 발가락부터 양말을 끼워넣고, 가방에는 수련할 때 입을 바지와 수건을 챙겨 넣었다. 노트북과 이어폰, 수련할 때 입을 옷들, 늘 나의 가방에는 익숙한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서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5시 35분, 집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조금 빠르게 걸었다. 조용한 도로가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어디론가 향하는 아저씨가 옆을 스쳐간다. 밤 사이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은 여성이 여전히 입술을 빨갛게 한 채 택시에서 내린다. 그녀를 내려주는 택시는 무심함듯 문닫는 소리와 함께 쌩 하고 출발한다. 불은 켜져 있지만 왠지 모르게 고요한 편의점, 아직 새벽 6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열려있는 식당에는 <아침 식사 됩니다.>라고 쓰여져있다. 지금은 새벽일까, 아침일까, 하는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걷는다. 어느새 도착한 지하철역에는 모두가 멍하니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핸드폰을, 어떤 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하철 선로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낸다. 내 가방에는 존 윌리엄스의 <STONER>가 들어있다. 시간 맞춰 역에 도착했기 때문에 지하철이 나를 반기듯, 웅웅 소리를 내며 선로에 들어선다.
5시 48분, 역의 시작을 알리는 첫 지하철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늘 앉을 자리가 없기에 창가에 살짝 기대어 책을 편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을 관찰한다. 팔짱을 끼고 자는 사람들,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는 사람들, 가끔 책을 읽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 시간에는 지하철에 주로 나이든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그들은 노동자일 것이다. 남자들은 공사 현장에 가는 듯한 복장을, 나이든 여자들은 대부분 파마머리를 하고서는 등산복 같은 것을 입고 있다. 정말이지 다들 비슷한 차림이다. 그들의 말투도 비슷하다. 약간은 어눌하고, 약간은 가라앉아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있음에도 가끔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음악과 함께 그들의 나레이션을 듣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주름과 약간의 그늘이 드리워져있다. 무언가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는 인상은 아니다.
다섯 정거장 정도를 지나면 지하철이 다리를 지난다. 지하철 창문에는 항상 어둡고 검은 그림자가 있다가, 겨우 드러내는 것이 ‘역 이름’ 정도인데, 이때만큼은 서울 중심의 긴 강과 새벽과 아침 사이의 햇살을 보인다. 지하철이 마치 꿈속을 달리는 것처럼 분위기가 바뀐다. 어제 읽었던 책에서 나온 ‘바르도’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새벽과 아침 사이, ‘틈’이라는 뜻을 가진 ‘바르도’를 떠올리며 풍경을 감상한다. 새벽과 아침 사이를 알리는 단어는 없다. 새벽, 아침, 낮, 오후, 밤, 이렇게 하루의 시간을 나눈다면, 새벽과 아침 사이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튼 묘한 풍경이다. 이때만큼은 책보다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풍경-명상 같은 걸 하는 것이다. “아, 우린 다들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을 할 때 쯤, 지하철은 다음 지하철로 갈아타라며 출입문을 열어재낀다. 나는 여기서 다른 호선으로 지하철을 갈아타야 한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뛰기 시작한다. 참 이상한 풍경이다. 이 풍경을 벌써 2주 째 보고 있다. 사람들이 뛰는 이유는 다음 열차를 타기 위한 시간이 너무 촉박하기 때문이다. 뛰지 않으면 갈아타야 할 열차를 놓치게 된다. 지하철 시간은 어느정도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뛰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는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서 뛰기 시작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뛰는데 ‘나도’ 뛰지 않으면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어어어어, 하다가 나도 모르게 뛰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셈이다. 그런데 오늘은 뛰지 않았다. 단지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다. 그냥 그 광경이 뭔가 기괴했기 때문이다. 너무 촉박하게 맞춰져 있는 다음 열차의 시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서둘러야 한다는 게, 뭔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천천히 걸으며 내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뛰는 모양이 엉성했다. 뛰기 싫은데 억지로 뛰는 것처럼, 뭔가 다급하면서도 불안하게 보였다.
나는 뛰지 않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음 열차가 오기까지 10분을 기다리라는 벌을 받았다. 자리에 앉아 다음 열차를 조용히 기다렸다. 뛰었던 모든 사람들이 열차를 타고 난 후였기 때문에 너무나도 조용했다. 마치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내 앞의 열차를 타고 모두 소멸해버린 느낌이었다. 재난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지하철 역은 정말 조용했다. 다행인 것인지,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기에 저 멀리에 한 두사람이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책에 다시 시선을 고정하고, <스토너>를 읽어나갔다. 10분이 지나고 나서 다음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두 번째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두 번째 지하철은 두 정거장만 가면 내가 내릴 ‘신사역’에 도착하기 때문에 정말 짧다고 느껴진다. 책을 좀 읽기 시작하려면 벌써 도착해서 다시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다. 약간은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덮고 내가 아침마다 수련을 하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은 4번 출구에서 매우 가깝다.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핸드폰을 한 번 확인한 후 수련장으로 향한다. 4번 출구로 나오면, 어느새 아침과 새벽 사이를 지나 완연한 아침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6시 25분, 도착하면 30분쯤 될 것이다. 수련장은 한 건물 5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들어서는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져 있다.
<몸을 수련하면, 마음은 좀 더 고요해질 것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발장이다. 털이 달려있는 UGG 슬리퍼, NEWBALANCE 운동화, 심지어 여름용 슬리퍼도 보인다. 신발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서로 싸운것처럼 흐트러져 있다. 나는 괜히 반가운 느낌을 받은 후에,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런 게 숨길 수 없는 성격일까, 어떤 사람들은 왜 신발을 벗어서 그냥 들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신발장에 넣는걸까? 또 다시 엉뚱한 생각을 하며 탈의실에 들어가 한겹씩 옷을 벗는다. 가볍게 반바지만 입고서는, 나의 매트가 보관되어 있는 곳에서 긴 막대를 뽑는 기분으로 돌돌 말려있는 요가 매트를 꺼낸다. 마치 인쇄소에서 돌돌 말려있는 엄청난 크기의 인쇄지를 뽑는 느낌이다. 매트에서 약간은 쿰쿰한 냄새가 나고, 나는 말려있는 매트를 빈 자리에 깐다.
새벽 6시 30분인데도 수련장에는 약 30명이 숨소리를 거칠게 내며 열심히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다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바깥에서 보면 정말이지 웃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점프를 하고, 옆으로 몸을 기울이고, 물구나무를 서고.. 몸을 길게 뻗었다가 다시 접고.. 하지만 누구도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무도 웃지 않는다. 진지하게 두 손으로 몸을 띄우고,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한다. 나도 그 분위기에 못 이겨 자연스럽게 들숨과 날숨에 몸을 맡긴다. 숨을 마시고 손을 들어올리고, 숨을 내쉬며 몸을 접는다. 다시 고개를 들고, 팔굽혀 펴기 동작을 한다. 매트에 얼굴이 살짝 닿는다. 다시 천장을 바라보며 상체를 일으키고, ‘down dog’이라고 불리는 자세를 취하며 다리 사이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내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동작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다들 탄탄한 몸에, 진지한 얼굴을 하고, 머리는 땀에 젖은 채 수련에 집중하고 있다. 다들 자신의 삶에 진심이다.
무엇을 위해서 다들 이렇게 열심을 내는 것일까, 무엇이 이들을 여기로 새벽마다 이끄는 것일까, 호기심이 가득 찬다. 나도 그러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지만, 무언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수련장의 열기가 계속 달아오르고, 땀이 한방울씩 떨어진다. 그렇게 새벽과 아침의 ‘틈’은 사라지고, 완연한 아침이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