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요가와 교육학
나는 요가와 해부학보다, 요가와 교육학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여기서 언급하려는 교육학은 어떻게 요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 그런 방법론에 관한 게 아니다. “마시는 숨에 손을 모아서 올리고.”라는 큐잉을 강사스러운 톤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요가를 가르치는 사람은 일종의 교육자로, 어떤 자세와 정신으로 수련실에 들어가는가, 혹은 그 수련실을 이끌어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 교실에서 10대 학생들과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느끼는 개인적 인상일 수 있으나, 요가 수련장은 ‘교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성인들을 위한, 특히 성인들의 몸과 정신을 고양시키는, 어떻게 보면 체육 시간과 철학 시간이 합쳐진 성인 학교인 것이다. 몸과 정신의 통합, 균형, 그리고 의식을 넘어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내적 여행 같은 것이 수업의 목표인, 성인 교실이 바로 요가 수련원인 것이다.
요가원이 10대 교실과 다른 점은 성인-학생들이 자발적 의지로, 자신의 경제적 자산을 투자하여 수련실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건강해지려는 의지가, 몸을 깨우려는 자발적인 마음이 있다. 어제보다 더 나은 하루를 보내려는 내적인 욕망이, 조금은 뒤틀어진 오늘의 하루를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설령 누군가의 목표가 어떤 자세를 성공하기 위해서 요가원에 나왔다고 해도, (나는 어떤 자세가 내적인 욕망을 내포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내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10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들이 억지로 학교에 나왔다고 해도, 그들이 ‘책상’(이것은 요가 매트와 같다.)에 앉아서 턱을 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순간 그날 각자가 마주해야 할 질문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같은 맥락에서, 성인들은 요가 매트에 앉아서 찌뿌둥한 몸을 스스로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어떤 자세를 취하는 순간,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탐구하는 출발점에 놓이는 것이다.
특별히 아쉬탕가라는 체계는 같은 것을 반복하므로, 아쉬탕가 요가를 함께 한다는 것은 몸으로 경전을 읽는 것과도 같다. 에캄, 드웨, 트리니, 차트와리, 각 번호마다 새겨진 영적인 이미지를 몸으로 함께 읽는 것이다. 소리 없이. 1.1 inhale Urdhva hastasana 라고. 무언가를 함께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적이고, 거룩한 일인지에 대해 감이 오지 않는다면 성혼선언문을 상상해보라. 두 남녀가 영원의 시간을 사랑이라는 것으로 묶는 작업에서, 수많은 증인들이 그 ‘두 사람’ 앞에 있고, 거기서 함께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말이다. ‘옴’이라는 단어를 함께 말할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화음과 수련실에 울리는 공기의 파장을 생각해보라. 함께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문(door)’과 ‘향’ 혹은 특별한 ‘의식’ 등으로 구별되어, 인간을 세속적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킨다. 10대 학생이 교실의 ‘문’을 열고 선생님과 ‘인사’(스승과 제자의 의식)를 나눌 때 교실은 학생을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리고 어떤 지식과 주제를 가운데 놓고 둥그렇게 앉아 그들은 함께 지적 혹은 영적 여행을 떠난다. 마찬가지로 요가원의 ‘문’을 열고 익숙한 나그참파 ‘향’을 맡고 매트 위에 앉아 ‘나마스테’라고 인사할 때, 그곳은 일상에서 마주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질문, 영혼의 세계를 탐구하는 무언가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강사는 거대한 나무이자 안내판이며, 참여하는 자들은 나무 밑에서 쉬며 일종의 열매를 먹는다. 요가 교육자는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