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쉬탕가와 마라톤
나의 경우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처음부터 수행하면 보통 2시간이 걸린다. 30분이 지나면 땀으로 온 몸이 흠뻑 젖는다. 땀이 눈으로, 코로 들어가고 온 몸이 땀으로 미끌거린다. 이 수행체계는 쉬는 시간도 없다. 마치 마라톤처럼, 일단 태양경배를 시작하면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날 피곤하다고 해서, 어떤 자세를 하기 전 “오늘 이 자세는 힘들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서 요행을 부리며 건너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선생님께서는 눈이 6개라도 달린듯, 순서를 빼먹거나 틀리면 귀신같이 오셔서 “혹시 이 자세 했어요?”라고 물어보신다. 아, 그러니 다시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질끈 묶고 몸을 띄우고, 두 팔 사이로 내 두 다리를 골인시켜야 하는 것이다. 목이 다 늘어난 오래된 여름 반팔 티셔츠처럼 복부의 근육이 흐물거려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섯 번째 나바아사나를 해야하고, 몸을 다시 뒤로 굴려서 일어나고… 그런 숨가쁜 마라톤 같은 이 수행체계 속에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할 틈을 갖지 못한다. 그런 틈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생각의 틈이 더 커지는 순간 앞으로 더 힘들어질 운명에 처한다는 걸, 몸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념’의 상태에 들어선다는 것이, 아무 생각없이 그저 몸이 기억할 뿐인 이 체계를 반복하는 것이 내가 지금 요가를 하는 가장 명확한 이유인 것이다. 요가로 무슨 깨달음에 이른다든지, 해탈을 한다든지, 대단한 성인이 되어 수염을 왕왕 기르고 가부좌를 한 체 “삶은 반복입니다. 고통이지요… 무의미하고…거듭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말하자면 내 안에 있는 이상적인 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시간이라도 아무 생각이 없는 무념의 세계로 빠지게 만들어주는 이 힘든 체계가 좋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불량 수행자이거나, 경전에서 말하는 하급 수련자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마음 한 켠에는, 만약 그 ‘틈’이라는 것이 앞으로 계속 넓어지지 않고 좁은 폭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좁아진다면, 결국에는 하나의 무언가에 완전히 집중하는 상태가 언젠가 선물처럼 주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지는 진리라는 감각은, 정말 단순히 무언가를 반복하는 데서 주어지는 건 아닐까, 고대인들이 ‘호흡’이 최고의 명상법이라고 한 것처럼. 그 누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걸 못하겠는가? 하지만 그 단순한 들숨과 날숨이라는 두 가지 동작에 진리는 피어나는 것이다.
하루키 작가는 오랫동안 ‘뛰는 것’을 반복하면서 얻은 통찰을,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한다. “하루키, 끝내 걷지는 않았다.” 아무렴, 아쉬탕가를 수련하는 사람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겠는가.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 없이, 그저 자신만의 속도로 끝내 멈추지 않는다면, 모든 수련은 진실한 것에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