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평범한 고통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새로운 커피와 함께 새로운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뭔가 힘들다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는 무엇을 해?” 나는 다리를 꼰 채로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물었다. 이 질문은 누군가를 알아갈 때, 그니까 그 사람이 삶의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싶어서 꼭 한 번씩 묻는 나만의 질문이었다. “그런 날은 보통 아무 것도 하지 못해.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종일 하거나, 음식을 왕창 먹어.”라며 그녀는 불만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그런 행동을 스스로도 원치 않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느끼지만 그런 날은 도저히 자신을 통제할 수 없어서 침대에서 그냥 무너져있는 것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날이 있다고 대답했다. “자극적인 음식도 엄청 많이 먹고,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을 찾아보고, 괜한 열등감에 빠지고, 그날 받은 스트레스로 다음 날 아침부터 더 열심히 운동을 하곤 해. 죄책감을 원동력으로 삼는다고 할까?” 나는 그녀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서 나와 비슷한 모습을 보아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그녀의 대답에 일종의 안정감을 느끼고, 그녀에게 조금 더 흥미가 생겼다. 

”그런 날은 있잖아. 마치 임신한 것처럼 몸이 조금씩 조금씩 부어오르는 느낌이야. 그래서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누구도 내 그런 모습은 모를 거야. 그런 날은 풍선처럼 그냥 둥둥 떠있는 거지. 그렇게 눈이 벌게진 채로 핸드폰을 하루 종일 하면서, 깊은 바다에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으로 늦은 밤까지 시간을 죽이곤 해. 볼 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가 문득 거울을 보면 정말 내 자신이 너무 못생겨보이는 거 있지. 못났다, 싶은 거야. 가-끔 그런 날이 있어. 나한테도. 나도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녀는 그런 고통스런 날도 삶의 일부라고 이미 받아들인 듯, 약간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너는?” 그녀가 이야기를 마치고 커피를 다시 홀짝이며 물었다. “음.” 나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가장 솔직하게 내가 고통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지 고민한 후, 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는 많은 글을 써. 그런 날은 생각이 몇 배로 많아지거든. 너가 많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그 돋아난 식욕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무성한 잡초처럼 불어나는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울적한 기분으로 계속 글을 쓰는 거지. 대부분 쓸 데 없는 말이고, 잡념들이야. 이러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이러면 어떨까, 또 저러면 어떨까, 아니 이랬으면, 아, 저랬으면, 하고 계속 가정법이 뒤섞인 문장들을 섞어가며 도대체 앞뒤가 맞지도 않는 말들을 늘어 놓는 거지. 맞아, 계속 늘어지는 거야. 아이가 엄마에게 떼를 쓰는 것처럼. 엄마의 옷이 다 늘어지도록. 그렇게 해서 조금 해결이 되면 좋을 텐데, 꼭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라, 그렇게 쓰는 거지.”
”나에 대해서 쓴 글도 있어?”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마도.”
”아마도?”
”응 보통은 하루의 대부분을 기록하기도 하고, 또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면..”
”특별한 사람?”
”음, 그니까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자주 이야기를 나누면 특별한 사람이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실제로 그녀가 특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대단히 특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더 추궁하지 않고, 비도 좀 그친 것 같으니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자신이 잘 아는 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자신이 밥을 사겠다고. 듣고 보니 대화를 나누는 도중 비는 그쳐 있었고, 여전히 흐리긴 했지만 장소를 옮기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우리는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커피들을 한 모금 더 마시고서는, 잔을 내려놓았다. 커피잔과 받침은 우리 대화처럼 다양하게 뒤섞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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