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개인주의자는 쾌락주의자이다.
젊은 시절 읽었던 책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모든 개인주의자는 쾌락주의자이다.”
조금 더 강한 어조를 엇붙인다면,
“모든 개인주의자는 쾌락주의자에 불과하다.”
나는 이 말에 꽤 양심이 찔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느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인은 개인의 구원만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으로 시작하여 ㅡ 즉 천국에 대한 확신 혹은 대속에 대한 확증 ㅡ 공동체, 즉 둘 이상의 협동으로 나아간다. 만일 어떤 기독교인이 단지 천국에 가기 위해 기독교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는 진정 개인주의자 혹은 쾌락주의자에 불과할 것이다.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나오는 한 장면처럼, 안전한 지대로 향하는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 그 누구보다, 아니 그 어떤 어린 아이보다 자신이 먼저 탑승하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자신의 구원이 이뤄질 수만 있다면, 즉 내가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깟 순간적인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한 인간처럼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단순히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적어도 내가 배운 기독교는 그러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당연히 그런 행동을 낳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종종 개인의 깨달음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지닌 나의 모습 속에서 죄책감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거나,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고 명상을 하는 나에게도 마음 한 켠에는 인류애 혹은 가난한 자, 약자, 병든 자, 그 모든 사람들 곧 자신의 힘만으로는 무언가 세계를 돌파하기가 어려운 이들에 대한 박애정신을 떼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렇게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나를 스스로 바라보는 유체이탈적인 명상 행위보다, 당장에라도 누군가에게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쉽사리 끊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꽤나 자부할 수 있는데 ㅡ 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방랑을 했기 때문에 ㅡ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제 각각 아픔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버릴 수 조차 없어서 끙끙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은 모두 불행하구나 생각하기도 하면서, 교육의 부재라든지, 태생적인 가난이라든지, 이 변하지 않는 비대칭적인 사회구조라든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얄팍한 관심 정도에서 그쳐서 늘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종의 죄의식, 죄책감은 내가 기도를 할 때나, 명상을 할 때나, 항상 언젠가는 처리해야하는 잔여 감정으로 늘 남아있었다. 그리고 글을 적는 지금도, 한 책을 읽으며 이전에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저 심판대같은 글귀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려하는 나는 개인주의자로, 지금 누군가는 이유 없는 죽음에 시간을 마감하지만 나는 여전히 깨달음이라는 쾌락을 추구한다.” 고 말이다.
적어도 나를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누군가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 누군가는 아주 진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지만, 그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나간 연인들이 대부분 웃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를 보았기에. 이는 나의 변하지 않는 모순, 혹은 작위적인 현자행위, 겉치레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일종의 고해성사처럼, 글을 통해 내 마음을 적고 있을 뿐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세계는 참으로 미친 것이라고, 이상하다 못해 이해불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내 앞에는 영혼의 순수함을 전혀 잃지 않은 채 오래된 자전거를 타고 나를 스윽 쳐다보며 웃음짓는 아이들이나, 평생 자신의 삶을 통해 일궈온 가족들과 낡은 집에서 오토바이를 닦으며 오후를 준비하는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할아버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군가는 지금 학대를 당하다 못해 자살을 결심하고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거나, 테러리스트의 위협을 받고 있거나, 성폭행을 당하고 있을 수 있다. 세계는 지금도 수억개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죽음, 비애, 사랑, 쾌락, 안위, 평화 등의 언어로. 누군가는 죽어가고, 누군가는 살아난다. 마치 들판에 어떤 꽃은 피어나고, 어떤 꽃은 시들어 죽어가듯이. 그것은 아무 일도 아니며, 세계는 그렇게 생성과 소멸, 양과 음의 반복일 뿐이라고 말이다.
나 또한 이런 죄의식을 안고 있을 뿐, 당장 어떤 어려움이 있는 곳에 달려가진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차가운 차를 한 잔 마시고, 화면이 깨끗한 노트북에 손을 올리고 타자를 두드리고 나의 생각을 관조하는 쾌락주의자니까 말이다. 다만, 다만 나는 그런 존재임을 자각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뿐이다. 적어도 난 무언가를 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은 아니니까. 이것 또한 정신적 자위일까, 나는 그런 뜬금없고 무색한 생각들을 늘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