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어느날 그녀는 나에게 묻기를 ㅡ 사실 내가 먼저 던졌던 질문이지만 ㅡ 목표가 있느냐고 했다. 목표라니, 너무 현대적인 단어이다. 내가 던진 질문이지만, 어쨌든 언어는 자기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상대방에게 던진 질문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과 전혀 다르지 않기에 나는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깨달음은 목표와는 조금 먼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성취 혹은 자기계발, 성장, 그 모든 ‘나아감’보다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인식’ 곧 나아가지 않고 멈춰있으나 영원한, 표현해놓고도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이것과는 너무 다른 목표라니.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대답은 “나에게 목표같은 것은 없다.”였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람이 되고 싶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떠다니는 바람. 하지만 그 바람이 어딘가에 머물게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특별히 어떤 지혜를 구하는 사람말이야. 그런 사람을 만나면 지혜를 들려주고, 나는 다시 바람처럼 떠나가고 싶다.”
이것은 거짓을 하나도 보태지 않은 그날의 내가 댑변한 내용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두 가지를 소망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방랑이었고, 하나는 지혜였다. 지금 바로 눈을 들면 보이는 저 구름처럼,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언젠가 잠시 멈춰 비를 떨어뜨리는 구름처럼 ㅡ 만일 비가 지혜라고 비유한다면 말이다 ㅡ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때로는 현실적인 지혜도, 때로는 비현실적인 지혜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움직이고, 떠다니며, 동시에 지혜를 간직한 바람이고, 구름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대답을 한 후, 이것이 참으로 나에게 솔직한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대답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 스스로도 흥미롭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표는 아직 말해주지 않을 것이지만, 그저 내 대답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그녀가 현대적인 사람이었다면 나를 우스꽝스러운 어린아이로 바라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렴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솔직한 내 답변이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방랑과 지혜, 나는 그 두 단어를 그 날 계속해서 곱씹었다. 우리는 서로 약간의 호감 비슷한 걸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이 방랑에 대해서는 상대방이 슬퍼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항상 그랬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남겨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지혜에 불과했다. 내가 만났던 모든 여성은 지혜를 갈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 곧 연인의 가능성을 겸비한 존재는 언제나 나에게 소유권을 요청했다. 그녀가 나를 소유하고, 구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떤 호감을 발생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므로, 그것에 호감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보고, 소유하고, 느끼길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이날의 답변은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작별인사 같은 것이었다.
조금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나는 이러한 나의 성향을 장애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말하는 것인데, 나는 정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거부감도 강할 뿐더러,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것을 죽음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구름이 있을까? 지혜를 겸비한 어떤 것이자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를 다시 빗대어 표현한다면, 나는 차라리 나를 ‘나무’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비유이지만, 나는 내가 나무가 되더라도 바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려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나이가 들어가는 나무는 참으로 멋있는 것이지만, 환생을 한다면 나는 나무가 될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민들레라면 모를까.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좋아했다.
“날개가 있는데, 날면 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