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와 지혜
중요한 것은 관조하는 자세였다. 지혜는 관조에서 피어난다고 믿어졌다. 관조는 ‘지루한 상태’의 다른 표현이었으며, 동시에 지루함을 견디는 사람이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미쳐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리를 들썩거리거나,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거나, 쓸 데 없이 어딘가를 들락날락 거리거나, 수많은 사진을 들춰보거나, 그 외에도 수많은 것을 통해 도저히 가만히 있지 않으려했다. 인간이란 본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루함을 견디는 것이 종교 혹은 구원의 본질인 것일까.
요가를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도 아사나라는 것에 많은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사나, 곧 좌위법 안에는 ‘정화’라는 신성한 작용이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나를 정화가 아닌 훈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수행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자세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싯다르타가 말한, “그것은 결국 기예에 지나지 않는가.” 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이 요가-수행이라는 것 안에도 수많은 유혹들이 존재하는구나, 생각했다. 수행계 안에서도 화려한 것들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것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는 다소 비딱한 시선으로 그것을 의심하고, 또 다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파멸하는구나, 비딱히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또한 무언가를 관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느꼈다. 명상을 할 때면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기가 무척 힘들었으며, 차라리 화려한 아사나를 취하는 것이, 온 몸에 힘이 완전히 빠져버릴 정도로 신체 수련을 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는 자신 또한 일반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 또한 싯다르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나무 아래서, 무한한 바다 앞에서, 낯선 여행지의 낡은 숙소 안에서, 고작 하루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남을 힐난하면서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다. 수많은 비판은 그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보여주었고, 그가 비난하는 모든 것이 그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퍽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관조, 묵상, 무념, 무상, 그 모든 것들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음과 가까이 있음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딘가에 내리쬐는 햇살과 그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 보는 것을 좋아했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은 빛과 어둠, 이 단순한 것 안에서 모두 표현되고 있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빛이 내리쬘 때면, 그는 손을 들어 손 등위로 빛이 자리 잡는 걸 보았다. 빛은 피부의 수많은 모공과 솜털까지 세세하게 비춰주었다. 따뜻한 빛이 그를 감싸면, 그는 세계가 얼마나 단순하고, 또 허망한 것인가 괜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아직, 여전히 배운 게 없던 그는 그저 그런 ‘느낌’만 갖고 있을 뿐, 여전히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매번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자신을 수련하였다. 그것이 참된 수련인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수행을 거듭할수록, 인간이란 참으로 미련하고, 불행한 존재라고 느꼈다. 자유를 갖고 있음에도, 스스로를 이렇게 묶고, 팔과 다리를 꺾고, 자신을 가두고, 먹지 않아야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고통에 갇힌 존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관조하였던 것은, 인간이 가진 비애였을지 모른다. 요가의 어원처럼, 스스로를 자유로부터 묶어내는 자유만이, 그 고통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행위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니. 얼마나 슬픈일인가, 하고 그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럼에도 그는 명상에 침잠하지 못하였다. 그가 가진 능력은 오로지 비판하고, 비난하고, 똑같이 따라하면서도 자신은 싯다르타와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정말 바보 같은 일뿐이었다. 다만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말을 줄이고, 글을 줄이는 것이 그나마 현명한 일이라고, 그나마 지혜로운 일이라고, 그저 관조하고, 보고, 쓴웃음을 지는 것, 그것으로 시간을 매듭짓는 것이 차라리 낫구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