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으로부터의 자유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얼마나 이 바보같고 우스꽝스러운 움직임 - asanas - 을 반복해야 수련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그 또한 다양한 자세들을 훈련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것은 요가로 들어가는 문일뿐, 아무것도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만약에 이러한 자세를 수행하는 것 혹은 어려운 자세를 성공시키는 것에 비밀이 있다면, 어찌하여 부따는 앉아있었는가 ㅡ 하는 의문을 깨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다양한 혜택이라고 불리는 아사나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의심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혹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떨칠 수 없었다. 정말 이 고생, 바보같이 발을 목에 걸거나, 지나친 유연함이 ‘정화’ 작용을 일으켜 내 몸을 깨끗하게 하면 심과 신이 자유에 이르는 것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인식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은, 특별히 시각인식으로부터 부자유하기 때문에 아사나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자세를 연습하면서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상하게 설명할 수도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배운다거나, 호흡과 자세, 시선을 일치시킴으로써 엄청난 몰입에 이른다거나, 하는. 그에게는 그만큼 여전히 비딱하면서도, 무언가를 받아들일 자세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 모순 그 자체였다. 때때로 그의 자세를 자랑하면서도, 자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무엇보다 깨달음에 이르고 싶어했다.

그는 아사나를 쾌락 행위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땀을 지독하게 흘린 날이면 ㅡ 마치 기독교에서 광적인 예배를 비판하는 것처럼 ㅡ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마치 남성이 사정 후에 느끼는 시원함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그렇다, 그는 땀냄새 나는 그룹 수련을 때때로 집단 난교처럼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신체가 서로 닿지 않을 뿐, 많은 사람들은 땀으로 젖은 채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같은 해소감에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히자만 그는 이런 모욕적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왜 더 고독해지고, 홀로 남아야 하는지 스스로 더 큰 확신을 가졌을 뿐이다. 어쩌면 그의 마음에 정이라는 것이 너무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 인식의 한계에 부딪힌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배를 감정적 카타르시스의 현장이라고 비판했던 것처럼, 그는 요가의 육체 수련장을 집단 난교와 비슷한 맥락으로 읽고 있었던 것이다. 요가의 소위 ‘구루’라고 불리는 대 현자들이 제자들을 성추행했다는 이야기가, 그런 그에게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인간은 얼마나 고상한 척 하는 돼지에 불과한가? 안경을 쓴 채, 고상한 자세로 서있을 뿐.

그는 그래서 이 자세의 수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어느 정도 깨달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홀로 생각했다. 이런 바보 같은 자세로부터, 이런 눈에 보이는 단순한 인식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고, 누군가의 몸을 고쳐주고 싶은 욕망 같은 것들로부터 진정 벗어날 수 있을 때, 그는 그제서야 눈을 감고 좌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나이가 들지 않으면 불가능 한 일일까? 그는 여전히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있는 날카로운 관념을 곱씹었다. 그렇게 비딱해진 그를, 적어도 위로라는 이름으로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글’ 밖에 없었다. 그가 스스로 적어내고, 그가 스스로 토해내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토한 것을 먹는 행위, 그것이 글쓰기였고 그에게는 그것만이 자신의 동물적인 본성을 그나마 추스릴 수 있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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