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가르침

그는 낯선 땅에서 요가, 수행을 배울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요가의 근원지라 불리는 땅 인도에서 수행한다고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인도가 아닌 다른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요가의 발상지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중요한 건 그저 배움의 갈증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너무 상업화된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언제나 속세의 유명세를 타고나는 곳들은 그것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기에, 그는 다른 적절한 곳을 찾아서 헤매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네팔의 작은 마을, 산과 도시 중턱에 있는 수행지였다.

그곳에서는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잠들기 전까지 요가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었다. 좌위법(asanas)과 명상(metidation), 호흡법(pranayama), 요가 철학(Philosophy), 요가 해부학 등 많은 배움들이 하루 안에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쏟아져내렸다. 그는 매일 누구보다 일찍, 먼저 일어나 수련 공간에 에너지를 채워두었다. 하지만 그런 진지함이 그를 ‘yogi’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어떤 자세에 집착했고, 마음의 자아가 별처럼 가득 차 있었으며, 어떤 스승님은 스승으로 존중하지 않는 등, 그에게는 여전히 불의 요소가, 진지한 만큼 뜨겁고 날카로운 칼이 마음 속에 가득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미움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는 여전히 세계는 자신과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매일 수련하고, 또 수련할 뿐이었다.

그는 어느 날, 요가가 정화(chikitsa) 작업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 몸은 성전이고, 거룩한 것을 담기 위해 매일 몸을 정화하고, 그 정화된 깨끗한 공간 안에서 호흡이 이뤄져야 한다고 배운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죽이는 육식을 한다든지, 술과 담배 등 다양한 쾌락에 젖어 몸을 더럽힌다든지, 지나친 성생활로 몸 안에 정을 빼낸다든지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해야함을 배웠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같은 소년의 마음으로는, 또 의지로는, 그런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스승님에게 물었다.

“언제쯤 내가 채식을 할 수 있습니까?”

“수련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요가의 방향성은 살생이 아니라, 생을 살리는 일이므로 요가 수련을 할수록 생명을 가까이 하게 될 것이라는 간단 명료한 말이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내가 수련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면, 요가-수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죽이고, 죽은 것을 먹고, 생명을 갉아먹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는 당황했다. 그는 전혀 변화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육체의 쾌락과 술, 담배 등에 마음이 붙잡혀 있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위 꽉 막혀있는, 전봇대 같은 성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 세계 곧 속세에서도 살 수 있고, 현인들의 모임에서도 어색하지 않은,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는 두 가지 대조되는 세계, 곧 흑과 백 혹은 빛과 어둠, 이 모두 결합된 이상 세계를 갖고 싶어했다. 남성과 여성, 강함과 부드러움, 지성과 감성, 실재와 추상 등 다양한 두 가지 면모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단일성에 대한 부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매일의 수련일 뿐, “이제 무언가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당신은 말 한 톨도 할 수 없는 아쉬람에서 오랜 시간을 수련하였는데, 훌륭한 성자 혹은 구루를 만나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훌륭한 구루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승은 대답해주었다.

“두 가지 구루가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으나 자신 스스로 만족하는 구루가 있고, 또 다른 구루는 자신에게서 만족하지 않고 깨달음을 나눠주었습니다.”

두 번째 대답도 간결했다. ‘훌륭하다’는 표현 안에는 타인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힘이 포함되어 있어야했다. 대답을 들은 그는, 그것이 지혜라고 느껴졌다. 지혜는 보여져야 하는 것,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발현되는 것, 눈을 들면 햇살이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채듯이, 누군가 지혜를 구하려 할 때 지혜자를 보면 지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다고 순간 생각했다. 가르치는 일, 지금 내가 가진 지혜를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일은 좋은 것이구나, 그것은 그에게도, 또 나에게도 좋은 것이구나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배움이 쌓여져 갔다. 수련 시간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나누는 과정 속에서 아픔과 슬픔, 실패와 성공을 들었고,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수련장에서의 30일은 매우 빠르게 흘러갔고, 그는 매일 좌법과 명상으로 스스로를 정화시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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