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

구불거리는 언덕길을 넘어 충무로 근처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대학생들의 걷는 모습이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취향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자신감 있게 걸어다녔고,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어폰을 통해 날씨와 어울리는 음악을 듣고 있는 듯 보였다. 날씨는 화창하다 못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고, 따뜻한 기운은 학생들을 답답한 교실이 아닌 풀밭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카페에 들어가 앉을 자리를 살폈다. 카페는 안쪽으로 깊숙이 파인 동굴과 같은 구조였기 때문에 입구 근처로만 강한 빛이 들어왔고 안쪽으로는 형광등만 비추고 있어 빛이 좋은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 안에서도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험공부를 하는 듯 집중해서 책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 또한 시험 공부를 하듯 첫 미팅 때 나눌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멍하니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커피가 나왔다는 점원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잠시 후 들어온 그녀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나는 이제 막 다시 시작한 개인적인 사진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설명했다. 이 설명은 첫 미팅 때마다 하는 것이며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설명하는 맥락이 조금씩 바뀐다. 마치 중요한 구슬을 감싸고 있는 점토처럼, 겉모양은 바뀌는데 안에 중요한 구슬은 늘 그대로인 것이다. 이날 나는 조금 무른 점토처럼 설명을 풀어나갔는데, 중요한 건 “힘을 빼주세요.”라는 말이었다. 과시할 필요가 없는 사진이니, 덤덤하게 카메라를 봐달라는 요청을 20분에 걸쳐서 해버렸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내 지루한 설명을 끄덕이며 모두 들어주었고, 이후 별로 마시지 않은 차가운 커피를 들고 눈부신 햇살이 가득한 충무로 골목길로 들어섰다. 

나는 생전 처음 가보는 장소였는데, 필동이라 불리우는 이곳은 생각보다 정겨운 곳이었다. 한국인이 정겹다고 표현할 때는 대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다소 옛스럽고 때가 타지 않았으며, 오래도록 ‘정’이 머무르는 공간 같다는 뜻일 테다. 세월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곳에는 언제나 ‘정’이 머무르고 있다. 필동이 그랬고, 이곳의 나뭇잎과 집들이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오래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첫 촬영 이후 5월에 접어 들어 새롭게 올라오는 초록색의 나뭇잎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에 초록색에 자주 눈길이 갔다.

테스트를 하면서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 뚜렷하지만 꽤 많은 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졌다. 빛과 어둠의 대비처럼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밝지만 가까이 가기에 거리가 먼 사람이 있고, 겉으로는 조금 차가워보여도 거리가 쉽게 좁혀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걸음의 보폭이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거리가 있다. 인간이라면 응당 그림자를 소유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밝은 부분과 대비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인물 사진은 두 번에 걸쳐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알아가게 된다. 첫 번째는 촬영하면서 그 사람의 외면을 보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특징들, 쉽게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들, 여러가지 사회적 습관들. 두 번째는 편집하면서 그 사람의 내면과 그림자를 관찰하는 것인데 신기하게도 사진을 편집하면서 그 사람을 더 멀리서 또한 객관적으로,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면 내면적 요소들이 보이게 된다. 이건 순수히 착각일 수도 있고, 바보 같은 관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기민함이 촬영한 사진을 선별하고, 결국 마지막으로 ‘작품’스러운 것을 골라내는 데 중요한 능력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결국 좋은 사진은 오래 바라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겪었던 딜레마이지만, 일반적으로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외면적으로 잘 나온 사진을 선호한다.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는 ㅡ 역시나, 당연한듯 ㅡ 내면이 잘 보이는 사진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편집 이후 컬러사진을 바라볼 때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들고, 흑백 사진에 표를 던지며 말하길, “이게 더 좋은 사진이군.”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게 된다.

나는 테스트 이후 프레임을 더 크게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얼굴보다는 전체적인 구성과 색감의 대비가 잘 잡히면 좋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건 그날이 결정해주는 일일 테지만, 나는 아직 가보지 않은 남산골 공원에서의 장면들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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