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 한국에 돌아와 다시 시작한 인물 촬영.
흑백 인물 사진을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카메라를 들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싶은지, 또 1년 반의 공백이 만든 변화를 보고 싶었다. 자주 되뇌이는 말이지만 타인을 보는 일은 나를 보는 일이기도 하기에, 카메라의 네모난 뷰 파인더에 비춰진 상(像)이 궁금했던 것이다.
테스트 촬영이 있던 날 그녀는 검은색 나시에 빨간 가방을, 한 쪽 손에는 검은색 후드집업을 들고 있었다. 컵 안에 얼음이 차분히 담긴 카모마일 차 한 잔을 주문했을 때, 손에는 무언가 가득 쥐어져 있어서 다부진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물건이 손에 가득 들려 있기 때문에 자세들이 엉성하거나 어색하다는 느낌이 없었고, 바지런히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햇빛이 드리웠을 때 투명한 컵 안으로 투사되는 연한 초록색 찻물과 빨간색 가방이 검은색 나시와 기분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꼭 색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가방에 담긴 이야기와 빨간색의 의미가 더욱 궁금해졌다. 흑백 사진에 관한 것이지만, 컬러 사진도 염두에 두고 촬영을 시작했다.
나는 촬영하는 사람과 피사체 간에 보이지 않는 교류가 있다고 믿는다. 이 보이지 않는 기류에 대해서, 말하자면 정신적 교감에 대해서 나다르는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무엇보다 모델을 정신적으로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 기민한 감각을 통해 모델과 교류하고, 그를 판단하며, 그가 자기의 습관과 생각, 그리고 성격에 따라 행동하게끔 유도합니다. 그리하여 우연에 따라 진부하게 무심히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친근하고도 바람직한 내면의 닮음을 모델의 형상에 부여합니다.”
ㅡ 나다르
나는 이 문장을 굉장히 좋아했다. 무심히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내면의 닮음을 모델의 형상에 부여한다는 말은 인물사진의 본질이 아닐까. 그래서 22-23년에는 작업하는 사람들과 꽤 친밀한 교류를 위해 힘썼는데, 올해는 의도적으로 이것을 지양했고 오히려 약간의 어색함이 인물의 내면을 더 드러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인물을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약간의 어색한 기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학동과 신사역 사이에는 일종의 리듬감이 있다. 사람이 북적이는 신사역 4번 출구 앞의 큰 횡단보도를 뒤로 하고 학동역을 오르면 고즈넉한 언덕길이 나온다. 붉은 벽돌의 집과 옛터의 분위기가 여전히 느껴지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깨끗한 골목길이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큰 건물들 주위에 부드럽게 반사되는 빛이 부담스럽지 않게 인물을 비췄다.
나는 이번 촬영을 상상하면서 강하고 많은 빛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날은 그것이 틀렸다는 듯 첫 날부터 적지만 충분한 느낌의 햇빛이 드리웠다. 나는 되도록 말은 적게 하고, 공간과 빛을 찾아서 움직였다. 또한 관계의 기류가 너무 뜨지 않게끔, 그렇다고 너무 가라앉지 않게끔 적당한 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날의 온도와 눈 안에 들어오는 몇가지의 색감이 서로 잘 어울러진다고 느꼈다.
나는 딱히 어떤 자세를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을 촬영하는 내내 그녀의 긴 팔은 땅을 향해 축 늘어져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충분한 느낌이 좋았다. 면접을 준비하지 않아도 언제나 말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감 있는 사람처럼, 꾸미지 않은 듯한 몸짓과 눈빛이 카메라 안으로 들어왔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한 손에 핸드폰을 계속 들고 있었다. 이것이 아주 소중한 물건이라는 듯 보였고, 마치 손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핸드폰을 지지하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 조차도 너무 익숙해 보여서 언제 꺼내 입어도 자신의 몸에 익숙하게 달라 붙는 오래된 옷 같았다.
촬영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현재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신체의 많은 부분들이 가려지길 원했고, 밝은과 어두움이 강하게 대비되길 바랐고, 색이 제한되고 오직 빛과 내면이 드러날 것을 기대했으나 모든 것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긴 팔 위에 떨어지는 빛과 너무 강하지 않은 대비, 그리고 다양한 색감들이 촬영 하는 내내 사진에 묻어났고 나는 그 현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책에서 그런 문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신을 웃기는 방법은 인간에게 계획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것들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공원에서 나는 긴 초록색 울타리를 보았다. 나는 그녀가 숲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초록색 나뭇잎의 배경이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양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초록색 나뭇잎 울타리가 그녀를 감싸듯이 듬직하게 서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적당한 거리감을 느꼈다. 적당한 거리감-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과하게 요구하지 않는 그 정도의 거리를 느낀 것이다.
어쩌면 내가 찍은 것은 그녀가 핸드폰을 쥐는 습관일 수도 있다. 그건이 인물 사진에서 가장 주요한 특징일 수도 있다. 한 인물은 단순히 얼굴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소소한 습관들이 사진에서 나온다는 게 즐겁게 느껴졌다. 물론 이것은 사진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이미지이지만, 인물사진은 인물의 삶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어떤 습관, 자세, 표정 같은 것들을 안고 살아간다. 25년이 끝나갈 때 쯤, 다시 작업을 복기할 때 나 또한 나의 습관들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