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3월, 한국에 들어오면서 어렴풋이 다시 촬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렴풋이 든 생각이었지만, 조금씩 열망이 강해졌고 다시 인물촬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개인 스튜디오를 보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튜디오 촬영은 불가능했고, 대형 조명부터 스트로보까지 판매한 상태라 오직 자연광에 의지한 외부 촬영만 가능했다. 이전에 촬영하던 익숙한 방식을 벗어나야했고, 나는 오직 공간과 빛을 찾아다니며 “나는 무엇을 보려하는가.”에 집중해야만 했다.
가장 먼저 지금 내가 끌리는 인물사진이 무엇인지 찾아봤고, 이전에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과거의 내 시선을 추적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22년에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최랄라 씨의 작품이다. 뭐랄까, 얼굴이 너무 드러나지 않으면서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 색감, 필름 사진의 노이즈 등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딱 들어맞았다. 아, 이런 걸 찍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랄라 씨가 어떻게 작업하는지 찾아봤고, 검프린팅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라 디지털로 촬영하고 비슷한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다.



22년 개인 스튜디오를 갖게 되면서 나는 영상에서 본 것처럼 벽에 페인트를 칠했다. 여러가지 색을 칠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았고, 빨간색으로 결정한 후에 여러 명의 모델과 함께 작업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싶은지 명확하지 않아서였을까, 여러모로 미술작업(셋팅관련)이 어렵다고 느껴져서 한참 헤매고 어려움을 겪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지가 단순하게 그려졌는데, 실제로 그것을 내가 촬영할 수 있는 이미지로 구현하는 게 매우 어렵게 다가왔다. 또한 함께 합을 맞추며 작업을 해나갈 배우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다가 작업이 RED 시리즈로 발전되면서, 뒷모습 뿐만 아니라 빨간색을 주제로 다양한 작업을 이어나갔는데- 당시 작업을 25년인 지금 돌아보면 아무래도 ‘권태’라는 단어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빠르게 식어버리는 개인의 감정이 투사 됐던 거라 생각한다.






23년 중반부터는 흑백 인물 사진에 심취해 대비가 강하고, 무표정의 인물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사실 흑백보다 중요한 건 대비였고, 무표정이었다. 나는 사람을 정물처럼 표현하기를 즐겨했다. 연기가 들어가지 않은 인간의 본래 형태를 표현하고 싶었으려나. 웃지 않고, 힘을 빼고, 가만히 있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촬영한 사진들을 돌아보면 약간 마네킹 같기도 하고, 인형 같기도 하다. 뭔가 예쁜척하고, 사진에 잘 나오고 싶은 개인의 욕망을 지우려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냥 인간 자체를 보려고 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듯 하다.









그렇게 작업을 이어가다가 23년 6월, 나는 홀연히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기서 더 발견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더 발견할 자신이 없었던 것인지 불안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무언가 더 특별하고, 깊은 것을 보고 싶었는데 작업이 막힌 느낌이었고, 직장생활과 스튜디오를 겸하는 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꽤 어려웠다.
사진 연구를 이어가기 위한 건강한 습관도 좀 부족했다. 퇴근 후에는 해가 거의 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돌아오면 스튜디오는 어둡고 차가웠다. 조명을 한 두어개만 켜 놓은 상태로 음악을 들으며 혼자 시간을 많이 보냈다. 당시의 내 감정이 사진에 많이 묻어났을 것이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도통 확인할 방법도 없이 그저 작업만 이어나갔지만 불투명한 미래와 길이 보이지 않는 느낌이 무서웠던 것 같다.
이후 여행을 하면서 많은 빛을 보았다. 넓은 바다를 보았고, 푸르른 숲에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나는 조금 정화가 되었을까? 운좋게 나는 네팔에서 요가를 배울 수 있었고, 긴 여행의 끝자락 발리에 이르러 Ade 선생님과 따뜻한 아쉬탕가 수련생들을 만난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는 베트남에 머물렀는데, 나를 너무나도 좋아해주는 몇몇 사람들과 매일 아침 식사를 하며 정말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요가의 길로 진지하게 들어선 이후, 나의 생활 패턴은 완전히 바뀌었다. 늦게 자는 일이 없어졌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2시간의 신체수련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수련을 마치고 맑은 정신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약속을 지키고, 조금씩 건강해졌고, 몸도 마음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후 사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대상도 바뀌었다. 누나와 조카, 엄마와 아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촬영했다. 인조광을 쓰지 않고 자연광에 의존하면서 세상과 찰나의 순간들이 나에게 주는 아름다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장에 스튜디오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무엇에 끌리고 있는지 살펴봤고, 그때 발견한 사람이 바로 방상혁 작가님이다.
그의 사진은 내가 추구하던 흑백 사진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대비가 아주 짙었지만 그럼에도 과하다거나 부담드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 이런 사진을 찍으면 좋을텐데. 다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빠른 시간 내에 4명의 사람들이 연결되었다. 테스트 촬영을 거쳤는데, 생각보다 내가 표현하려는 대비가 나오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강한 대비를 원하지 않는것인가 생각했다. 1년 반 동안 쉬면서 사진이 뭔가 유해진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 없는 건 여전했지만, 사진 자체가 가지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