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탕가라는 클래식 음악
아쉬탕가와 거리를 두면서, 요즘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요가’가 아닌 ‘수행’이다. 수행의 본질, 심과 형에 대해서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분명 형에 집착해왔다. 집착까진 아니지만, 대부분 형에 집착하면서 수련하였는데 때때로 마음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느꼈다. 하지만 언제나 시작할 때면, 수련을 할 때면 형에 집중한 게 아닐까? 아닌가 잘 모르겠다. 마음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사실 교정을 많이 받을수록 자연스럽게 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어디를 어떻게 써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은 흩어지기 마련이다. 즉, 티칭하는 사람이 말을 많이 할수록, 수련자는 수련이 아닌 형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서 이렇게 써야 한다, 저렇게 써야 한다, 하고 수행자가 오만한 마음으로 지식을 늘어놓게 되면, 그 사람은 수련의 체계를 언어로 받아들인다. 수련은 비언어적이어야 하고, 훈련은 언어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건 어렵기 떄문에, 말하자면 둘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즉, 언어로 이해를 해야하는 시간이 있고, 비언어로 체화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즉, 여기에 훈련되어야 할 것은 바로 빈야사 암기다. 순서를 스스로 외우지 않으면, 아쉬탕가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즉, 흘러가는 것을 경험하기 어렵다. 내 음악이 어떻든 간에, 스스로 연주되어야만 한다. 스스로 연주해야만 한다. 스스로 연주하지 않으면, 결국 아쉬탕가 요가는 의미가 사라진다. 자기 수행, 마이솔 수행은 아쉬탕가 요가의 핵심이다.
연주했던 방식은 남아있지만, 완성도와 선예도는 계속해서 떨어진다. 이것은 하나의 통합된 악보이다. 악보는 사실 바꿔서 연주할 수 있지만, 잦은 변주는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여기에 하나 더 하면, 지휘자는 악보를 정확히 읽고 리드해야 한다. 지휘자가 악보를 바꾸면 결국 음악은 완성되지 않는다.
악보는 악보대로 연주하되, 필요하다면 따로 파트를 나눠서 연습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휘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바로 일정한 리듬, 일정한 속도, 일정한 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