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는 요가일 뿐, 요가가 아니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오해의 소지가 많은 이 문장은 최근에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요가는 요가일 뿐, 요가가 아니다."
이는 요가라는 '언어' 자체가 분류의 기준을 나타내는 하나의 언명일 뿐,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요가는 '요가'라는 언어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수행, 깨달음, 또는 해탈이나 구원 등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지시언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요가에 대한 험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은, 적어도 요가를 수행하는 나에게는 그렇다.
요가를 정의할 필요는 없다. 요가는 실제로 방대한 정의가 난무하는 수행체계이다. 그것의 기원이 어디든,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인류는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으로 축약된다. 다만 요가가 종교가 아니라 철학으로 분류되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 구원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구원받는 구조를 의미한다.)
다양한 수행 방법론 중에 고행, 육체 수련, 명상을 포함한 요가는 다른 종교와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분명한 것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체계라는 것이며, 모든 수련은 일종의 지점, 혹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몸을 뜨는 어떤 분야든 집중하여 한 지점에 온전히 몰입하면 우리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아마 올림픽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눠도 ㅡ 종교가 없는 ㅡ 분명 대화가 통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매일 아사나 훈련을 한다. 이는 내가 구원을 욕망함을 나타낸다. 스스로 자유한 존재, 신이 되고 싶은 욕망, 제어와 통제에 관한 욕망에 사로잡혀있음을 의마한다.
누군가는 구원을 갈망한다. 이는 삶이 괴롭거나, 삶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나타낸다.
요가는, 모든 인간의 공통정 소망의 산물이다. 구원과 해탈, 자유롭고 그로 인해 진리에 가까운 행복을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