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각자가 가는 길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믿는대로, 살아가고 있다.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 부유함이 행복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 가족을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인기를 얻는 것을 자존감으로 믿는 사람, 힌두교가 옳다고 믿는 사람, 기독교가 옳다고 믿는 사람, 종교는 없고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

유연한 자세를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 하루종일 명상에 빠져있는 사람, 누군가를 비방하는 사람, 고독을 즐기는 사람.

어떤 분야든 다시 길이 갈라지고, 갈라진 길 틈 사이에서 또 다른 길이 생성되고, 그 사이에서 갈등과 다툼이 생겨난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

언젠가는 ‘옳은 것’을 따질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나보다 젊은 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을 때는 더욱이. 흔들리는 그들에게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살아갈수록, 삶이란 건 그저 흔들리는 가지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귀결될 뿐이다. 사실 기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어렵다고 봐야 한다. 각자의 세계라는 건 각자의 세계만큼 또 다양하니까. 기준을 세운다는 건 그저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권력의 깃발을 세우는 것일 뿐이다.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을 쥔 사람이 하는 일이고, 기준에 따르는 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따라가게 되는, 억지로 맞게 되는 쓰나미일 뿐. 사람들은 모두 기준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다. 이미 사회는 수많은 기준이라는 권력의 깃발이 가득하지만.

홀로 수행하는 이들에게 기준이라는 건 없다. 그저 매일의 수련, 수행, 깨달음과 실수의 반복만 있을 뿐. 진정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기준을 나로 둘 수 밖에 없다. 주체는 스스로 기준을 세울 때 진정한 주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취향 혹은 느낌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뭉쳐서 그 안에서 또 다른 기준이 세워진다. (웃음) 결국 세계는 그렇게 모이고, 해체되는 과정의 반복인 것인가?

그래서 요가 또한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실제로 요가에는 수많은 의미가 있고, 대중적인 의미로 해석될 뿐이다. 요가는 스스로를 묶어내는 것, 수련하는 것, 수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대명사’일 뿐이다. 요가 안에도 학파가 있고, 각 학파가 옳다고 믿는대로 수행한다. 그러므로 요가를 한 단어로 제한하지 않고, 대명사로 넓게 바꿔 해석하면 모든 수행하는 사람, 깨달으려는 자, 구원받고 싶은 이들은 요기라고 볼 수 있다. 요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전제하고, 매일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들도 크게는 기독교인-요기라고 볼 수 있다. 요가는 방향성이지, 뜻이 아니다. 에너지의 방향일 뿐이다.

각자가 자신의 방향성을 갖고 살아간다. 각자의 믿음대로. 누군가의 말처럼, 각자 믿는대로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타인을 비방할 이유도, 원망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구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방과 원망, 폭력과 힘이 필요할 뿐. 홀로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힘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을 향한 열정과 인내만 필요할 뿐.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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